WALKING SLOW
느리게 산책하기
존경해 마지 않는 박찬욱 감독님의 ‘박찬욱의 오마주’를 처음 읽었을 때의 충격이 아직 선하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영화를 이렇게 사랑하는 시선으로 보고 읽어낼 수 있을까. 정말로 사랑이 충만한, 거대한 작업을 접한 뒤 나는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학교에서부터 강요당한 새로움에 대한 집념에 빠져, 뭐가 새로운 것인지도 모를 때부터 스스로를 새로움이라는 장르에옭아매고, 언젠가 본듯한 비슷한 모든 것은 새로운 게 아니라고 우겨대고 있었던 나를. 건축을 늦게 시작해서 기존 관념에 안주하기를 거부했던 만큼 또 다른 종류의 아집에-과거와 절연하고 새로운 걸 만들어야 한다는-잡혀 있었는데 그러고보니 나의 문제는 불우하게도 소위 내가 피하고자 했던 그 건축들(과거의 캐논 같은 또는 현대 거장들의 건물들)에 대한 공부도, 사랑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뭘 알아야 거기서 멀어질 것 아닌가.
오마쥬
그렇게 다른 이의 건축물에 대한 더 치열한 (사랑과) 공부를 다짐했던 그 때 이후로 종종, 그래서 내가 사랑하는 건물은 무엇인지 자문하곤 한다. 그 때마다 뻔한 몇 개의 건물과 건축가가 떠오르는데, 직접 가서 보고 만지고 들어갔던 건물들이 대부분이다. 당연하게도 무언가를 디자인할 때마다 그 건물들이 머리속을 들어갔다 나왔다 한다. 그렇지만 새로운 걸 해야 한다는 그 저주 때문에 설계에 무언가를 오마주(hommage) 해본 적은 아직 없었다. 서산에 예술가 마을을 설계하는 이번 프로젝트에서는 이 속박에서 꼭 해방되고 싶었다. 그리고 의외로 무엇을 오마주해야 할지도 분명했다.
뉴욕 워터밀 에 있는 패리쉬 뮤지엄(Parrish Art Museum)은 스위스의 그 유명한 건축집단인 헤르죠그 드 모롱 (Herzog & de Meuron Architects)이 설계했다. 쓸데없는 말이 길어지지 않도록 줄이고 줄이고 줄이자면 내가 그들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들 설계에 스테레오타입이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약하다). 매번 새로운 마음으로 제로 베이스에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하다니 그래가지고 누가 너희를 찾아올 것이냐는 문제를 언제나 어마어마한 퀄리티로 압살시켜온 팀. 그들의 작업 중에서 패리쉬 뮤지엄은 서산 예술가 마을 프로젝트의 조상격인 허물어질 옛 학교와 예술인 마을이라는 프로그램을 보고 제일 먼저 떠올린 선형의 구조에 가장 부합하는 건물이 아닐 수 없었다. 학교라는게 예전에는선형의 구조를 기본적인 타이폴로지로 가지고 있었으니까. 아니, 패리쉬 뮤지엄 때문에 선형의 구조를 떠올렸을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면 오래전부터 해보고 싶었던 구조형태의 가능성을 패리쉬 뮤지엄의 구조에서 봤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누군가 우리의 디자인을 보고 패리쉬 뮤지엄을 떠올릴 수 있을까? 우리가 오마쥬한 부분은 건물의 형태라기 보다는 목재와 철재의 하이브리드 구조, 즉 구조 시스템이었다. 철재(철골구조)가 전체 구조의 횡력을 받아주고 목재가 전체의 프레임을 받치는 시스템. 이렇게 얘기하면 디자인한 건물을 봤을 땐 바로 알아채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사실 건물을 조금만 뜯어봐도 구조프레임과 그 형태의 유사성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다. 패리쉬 뮤지엄의 구조가 두 박공지붕의 구조가 겹쳐져서 만들어지는 X자 형태의 중심구조가 프로그램의 변방을 이루며 통로의 역할을 하는 건물 형태를 만들어 낸다면 우리가 만들어낸 구조는 X모양의 구조적 겹침에서 시저(가위)트러스로 변형되어 프로그램을 삼등분하는 구조로 진화했다고나 할까. 어쨌든 우리가 구조를 발전시키는데 가장 중요했던 부분은 옥상으로 올라가는 구조들이 특별한 변형이나 추가 없이 나누어질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 부분을 구현하려다 보니 가위 트러스 하부 부분이 패리쉬 뮤지엄의 건물 중앙의 천정 하부에서 볼 수 있는 구조와 유사성을 갖는다.
이 천정의 구조형태(또는 구조미학)는 어쩌면 내가 20년 동안 만들고 싶어하던 거북이 등껍질 척추 구조를 어느정도 구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어… 그게 뭔가요? 일단 거북이 등껍질 구조를 살펴보자. 거북이 등껍질이 주는 단단하고 단순한 인상에 비해 그 내부의 껍질을 잡아주는 구조와 등뼈 간의 섬세하고 세밀한 연결 -아치라는 선의 연결에서 면을 바치는 구조로 이어지는- 을 보면 그 매력에 푹 빠질 수밖에 없다. 만약 신이 거북이의 등껍질 구조를 하나하나 세심하게 디자인하셨다면 디자인상을 몇 개는 받으셔야 마땅할 것이다. 이 멋진 구조의 기본적인 원리가 우리의 제안에서 천정 면을 바치는 역삼각 트러스 형태의 연결로 어느정도 구현이 되었다고도 볼 수 있겠다.
왜 사랑에 빠지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첫 만남에 사랑에 빠진 이후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까를 항상 고민했던 거북이 등껍질 구조는 Grimshaw Architects 의 Frankfurt Trade Fair Hall 정도는 되어야 어느정도 구현한 거라고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트레이드 페어 홀의 그 구조조차 선이 면을 바치는 형태는 아니다) 아치(arch)나 선과 면의 자연스러운 연결은 아직 없지만 면을 짊어지는 역트러스의 구조는 이렇게 의외로 간단히(?) 필요에 의해 장착되었다. 트러스는 역시 모든 구조의 어머니.
스펙타클은 피하고 싶다.
역시나 이 건물도 스펙타클의 함정에 빠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특히나 이 프로젝트 처럼 산중턱 ,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환경이라면 더더욱. 여기서 스펙타클의 함정이란 세상을 구경거리로 보기만 하게 되는 상태가 되어 사람이 행위자로서 직접 살고 참여하는 것이 아닌 구경꾼이 되는 상태가 되는 것인데, 이로 인해 사람은 환경 즉, 건축물을 단편적 이미지로 소비하게 된다. 이로 인해 공간은 단순한 본질은 단순해지고, 쉽게 요약되며, 곧 소진된다.[1] 사용하는 사람의 삶과 함께 끊임없이 변화하고 적응하는 건축물과 단순히 멋지게 바라볼 수 있는 건물은 다르다. 여기에 더해 우리는 사용자의 정신건강을 걱정하기로 했다. 도시의 분주함에서 벗어나 산골에서 살면서 삶의 일환으로 예술을 해야 하는 예술 생산자들에게 이 장소는 휴식과 일할 수 있는 시간을 보장해주는 곳일 수도 있지만 지루함과 우울함과 싸워야 하는 공간일 수도 있다. 아무런 인프라가 없는 이곳에 우리는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안 할 수 있는, 머리를 비우고 뇌를 휴식할 수 있는 공간을 기획했다. 그것은 건물 내외부를 아무 생각 없이 (또는 생각에 잠겨) 걸을 수 있는 가장 긴, 끊기지 않는 길을 제공하는 것이다. 집요하리 만치 끊이지 않는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일반적인 보폭으로 15분간 쉬지 않고 이동할 수 있다. 이 이동을 통해 사용자는 건물의 내부와 외부를 들어오고 나가며 옆 작업실에서 뭘 하는지 기웃거리고 지금 무슨 전시를 하고 있는지 볼 수 있다. 회랑은 옥상으로 연결되어 서산 주변의 꽤 아름다운 산세와 멀리 뻘 밭에 가까운 바다를 보며 편안한 멍때리기가 가능하다. 같은 공간을 더 오래, 낮은 밀도로 사용하기.
이미지
다 만들고 나니,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미지가 나왔다. 한옥 같다는 사람도 있고 (아마 긴 선형의 박공지붕을 보았을 때 나오는 일반적인 반응일 것이다.) 궁궐 같다는 사람도 있고(네 궁궐 같아요.) 일본 건물 같다는 사람도 있었다. 이미지의 원형이라면 원형인 반하우스(barn house-서양식 헛간)를 떠올린 사람은 의외로 없었다. 난 일본 만화Five Star Stories의 상상 속 도시나 코루산트 (Coruscant, Star wars 속 행성)의 템플이 떠올랐다. (스타워즈에 나오는 이제큐터급 스타드레드노트를 닮았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피라미드를 낮게 잘라놓은 것 같은 형태 때문일 것이다. 스펙타클을 피하려다가 오히려 약간 권위적인 이미지가 만들어진 건 기대하지 않은 행복한 오류일 수도, 실패일 수도 있다. 새로운 고민도 생겼다. 췟, 권위적인 이미지는 대체 어디서 오는가.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사실 모르고 있었나 보다.
이제큐터급 스타드레드노트 다음엔 더 비슷하게…
구조와 구축법만 가지고 시작해서 구조와 구축법으로 끝난 건물이라고 우리는 생각했는데 아마 표현은 그렇게 안된 것 같다. 어쩔 수 없지. 아마 모든 사람들에게 다 다르게 읽혔으리라. 공모전 떨어진 제안에 주저리 주저리 설명이 길었다. 그만큼 맘에 들었고, 이런 것도 한번 지어질 때가 되지 않았나 우리팀 멤버들 끼리 생각하고 그랬다. 우리 눈엔 새로웠는데 다른 눈으로 보면 아니었나 보다. 정슬아 소장님, 이주연양, 강명훈군,우리팀 모두 지치지 않고 끝까지 마무리한데에 다시한번 감사드린다.
[1] NOT (NOT) LANDMARK, 랜드마크 (안)만들기.
비워두자. 비워두자. 비워두자. 그래야 겨우 채워질 것이다.
아래는 공모전을 위한 텍스트
대구 옛 중앙파출소 부지 신축공사(competition)
Finalist
동성로에 위치한 중앙파출소는 ‘중파’라고 불리우며 대구 역사와 문화 네트워크의 출발점으로로, 시민들의 만남의 장소로 오랜 시간 기억되어 온 공간이다. 그 자리를 대신할 새로운 ‘중파 문화시설’은 중앙파출소가 지녔던 ‘시민의 일상과 역사의 기록물’로서의 역할을 확장하며, 시민의 에너지를 모으는 상징적 구조물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역사와 문화의 마중물이 될것이다.
새로운 중파는 이벤트를 위해 존재하는 공간이 아닌 일상의 삶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된다. 이를 위해 적은 인원만이 사용할수 있는 계단식 관람석 대신 다양한 일상의 공간으로 사용될 수 있으며 더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수평의 관람석을 제안한다. 이를 통해 관람석은 무대가 되고 광장과 건축물의 관계가 일방적이 아닌 상호적으로 바뀐다.
PS: 공모전은 대차게 떨어졌는데 여러가지 이유로 법을 한번 안지켜 보았다. 다시는 그러면 안될 일이다.